여느 해 같으면 오늘 같은 날 무얼 했을까? 아마도 술친구들과 어울리거나 집에서 가족들과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우며 보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뭔가 색다른 이벤트가 없을까 하고 고심한 끝에 나름대로는 정말 괜찮은 생각을 해냈다. 바로 『2004 끝 날부터 2005 새 날까지』라는 런닝 프로젝트다. 기왕에 장거리 LSD를 할 거라면 뭔가 의미 있게 해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였다.
먼저 동호회 게시판에 올렸다. 2004 마지막 번개라는 제하로 글을 올렸는데 반응이 시큰둥하다. 평상시도 아닌데다 대부분 약속이 잡혀있어서 호응도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두 분이나 연락을 주셨다. 장소를 내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 한강시민공원 잠원동으로 잡는데 멀리 분당에서 오시겠다는 한 선배님이 있었다. 또 운동은 못해도 뒤풀이에는 참석하겠노라는 선배님도 계셨다. 하지만 인원수도 몇 안 되는데 너무 멀리 서 오시게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신년에 다시 한번 번개를 하겠노라고 약속하곤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이번엔 아내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다른 날 뛰러 간다고 하면 누가 말려요? 하필 금년 마지막날까지도 꼭 뛰어야 되요?”
참,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나의 절대 응원군이 엥~ 토라졌으니.
“그것도 12시를 넘겨서 집에 돌아오겠다는 건 좀 너무 한 거 아네요?”
듣고 보니 그도 그렇다. 이런 날이면 마눌과 둘이서 쐬주 한잔을 기울이며 ‘여보, 올 한 해 수고했소’라는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아도 시원찮을 판에 ‘우리 외박 합시다’ 하고 게시판에 글을 올렸으니 어이없기도 하겠다 싶었다. 더군다나 12시 땡 치기 전에 안들어 오면 가출(?) 한다고 엄포까지 놓으니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LSD를 하지 말라는 건 아니지만 12시 안에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25km를 달리자면 적어도 2시간은 걸리는데 나름대로 2년에 걸쳐 달려보고자 했던 꿈이 사라지는가 싶었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이벤트의 제왕 아닌가? 순간 머리 속에 번뜩이는 아이디어 하나!
“그럼 당신이 11:50까지 집 앞으로 나와. 그래서 같이 한잔 하면 되잖아. 나 혼자 외박하는 것도 아니고. 그치 그치!”
마눌도 숙제를 해야 된다는 나의 의지를 아는 터라 그 정도에서 서로 의견을 절충하며 합의를 봤다.
겨울철은 집에서 몸을 덥히고 나오는 것이 좋다. 찬바람에 스트레칭을 하면 제대로 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또 제대로 되지도 않는다. 해서 가볍게 몸을 풀고 몸이 따습다 싶어질 때 집을 나섰다.
어제보다 바람이 세다. 여의도 방향은 맞바람이 분다. 얼굴이 아리다. 그나마 모자를 쓰니 한결 보온이 되는 것 같다. 서서히 손가락이 얼어온다. 첫날 권코치가 그랬다. 시계를 보지 말고 몸이 원하는 대로 따라 가라고. 시간을 정해 놓으면 부상이 따라 온다고. 그래 처음엔 의지보다 몸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 보자. 서서히 흔들리듯 한 3km를 달렸을까? 다리가 기분 좋게 풀린다.
사실 여의도까지 10km인데 좀처럼 몸이 풀리지 않는다. 맞바람의 위력이 대단하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대충 이 정도에서 턴 하려고 했는데 현실과 타협하기 싫어 굳이 3km를 더 가서 턴하니 이제는 바람이 안 부는 게 한결 낫다. 아렸던 손끝이 풀리면서 등에 땀이 촉촉히 젖어오는 것을 느낀다.
여의도 광장에 이르니 Run114에서 주최하는 『2005 새해 첫날 하프마라톤대회』를 시작하기 위해 스피커에서 왕왕 소리를 내며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었다. 참석자는 그렇게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11:25분! 마눌에게 전화해야 할 시간.
“지금 여의도야. 금방 갈께. 50분에 공원쪽으로 천천히 나와.”
아무리 계산해도 4분주로 달려야 10km를 12시까지 갈 수 있다. 하지만 4분주로는 달려 본 적이 없다. 적당히 가서 다시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속도를 높여보지만 4분대 진입은 힘들다. 이 상태로 가다간 시간에 늦는 건 둘째 치고, 다리에 무리가 갈 것 같아 그냥 5분주에 맞춘다.
잠원동 근처에 오니 남산에서는 새해 맞이 불꽃놀이를 한다. 마치 나의 장엄한 피니쉬를 축하하려는 듯 펑펑 쏴댄다. 마눌에게 이 장면을 현장 중계하기 위해 핸폰을 들었다.
“천천히 와. 무리하지 말고. 여기 토끼굴이야.”
아~ 벌써 공원을 지나쳐 토끼굴까지 왔구나. 미안한 생각에 마지막 피치를 올린다. 저기 오돌오돌 떨고있는 마눌의 모습이 보인다. 12:10분! 당초 계획한 대로 2004 끝 날에서 2005 첫 날까지 달리기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 성공은 천사 같은 마눌이 있어 가능했다. 아마도 2005년도 역시 기록향상을 하려면 마눌의 도움이 있어야 하는가 보다. 우린 늘 가던 ‘한잔의 추억’이라는 포차로 향했다. 정겨운 친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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